Alice in Wonderland

배수아 <나는 이제 니가 지겨워> 본문

Bookworm

배수아 <나는 이제 니가 지겨워>

Liddell 2020. 5. 31. 14:10

"유경, 네가 원하면 결혼하겠다."
처음으로 결혼이란 단어를 꺼내면서 교진이 나에게 한 말이다.
"너에게 달렸어. 나는 네가 원한다면, 좋다."
 
그때 이미 나는 교진을 처음 만나던 그런 소녀는 아니었다. 우리는 이미 너무 많은 갈등과 냉전의 시간들을 견뎌왔기 때문에 서로를 냉정하게 바라볼 수 있는 여유가 있었다. 나는 교진말고도 세상에는 남자가 많음을 알게 되었고 이미 다른 남자친구와의 잠자리도 경험한 다음이었다. 나는 교진이 나에게 주었던 것들, 언제나 단 한 번만 그럴 수 있는 봄날 같은 것, 그런 것들을 무시하려 애썼다. 내가 고뇌하고 있던 것은 잠자리를 같이 했다는 이유로 꺼내질 수 있는 '결혼'이라는 문제였다.
 
교진이 이 세상 정의의 편에 서려면 무시할 수 없는 문제였다. 교진이 신의를 지키려면, 교진이 부잣집 딸이나 유혹하려고 돌아다니는 내세울 것이라고는 고학력뿐인 엘리트 사기꾼이 아니려면, 여자랑 잔 다음에 나 몰라라 하고 줄행랑치는 비열한이 아니려면, 아무 생각없이 여고생을 유혹한 자제력이 결핍된 성욕과잉의 남자가 아니려면, 마음 가는 대로 사는 삶이 예술이라고 믿는 경박한 아티스트가 아니려면, 그는 나에게 '결혼'을 제의해야 하는 역할을 맡게 된 것이다.
 
(중략)
 
그러나 내가 정말 하고 싶었던 말은 연애에 빠져서 설탕물 속을 헤매는 파리가 되기 싫다는 것이었다. 육십살이 되어도 정글 속의 고릴라와 키스하는 그런 인생을 살고 싶어서 였다. 그러나 다시 기회가 주어진다고 해도 진정 그렇게 말할 자신이 있는 지 지금도 확실할 수는 없다.
 
어느 쪽이든 간에 나는 언어의 함정을 피해 갈 수 없었다. 말해 놓은 다음에 이게 아닌데, 하는 생각말이다. 그러나 다른 언어는 없다. 나는 교진이 양심의 가책 없이 나를 떠날 수 있게 해주면 되는 것이다. 나는 희생자였을까? 교진이 홀가분하게 새로운 여자와 결혼 할 수 있도록 도와준? 말도 안되는 소리다. 나는 무엇보다 더 큰 자유를 느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통은 강렬했다. 이미 우리를 연결하고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상태였다. 교진은 나에게 선택권을 주었지만

나는 선택의 여지가 없음을 알고 있었다.

우리는 생각이 다르다. 꿈꾸는 인생도 너무 다르다. 결혼하지 않으면 헤어져야 한다. 너무나 큰 폭력이다. 그러므로 결혼이란 그런 마지막 상황에서 보통 사람들이 내놓을 수 밖에 없는 카드였다. 오, 교진과의 모든 기억들이 솥 안에서 망가진 푸딩처럼 으스러지며 막을 내렸다.
나는 타인에게 감정으로 의지하는 것의 뒷맛을 충분히 맛보았다.
 
다시는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날 이후, 나는 강철이 되겠다고 결심했다.
 
(중략)
 
"마음을 정리했다고 하지 않았어?"
진숙이 궁금하다는 듯이 물었다.
"그와 관계를 갖기로 마음을 정리했어."
"그를 사랑해?"
"무슨 바보 같은 소리."
나는 코웃음치면서 일어섰다. 세트 메뉴의 마지막 코스인 커피는 마시지 않을 생각이었다.
식사 코스를 끝까지 앉아서 기다리지 않고 나는 언제든지 마음이 내키면 떠나갈 것이다.

애피타이저는 생략할 수도 있고 버터를 두껍게 바른 빵을 맨 마지막에 먹을 수도 있다. 가장 먼저 커피를 마시고 식사 전에 초콜릿을 먹고 야채 샐러드에는 간장 소스를 뿌린다.
 
겁낼 것이 무엇인가. 나는 연애라는 게임에서 패배하지 않는 방법을 안다. 그것은 '脫戀愛主意'이다.
 
 
-배수아씨, <나는 이제 니가 지겨워>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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