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worm

<험한 길> by 헤르만 헤세

Liddell 2010. 11. 24. 11:44


협곡의 입구, 어두운 바위 문 옆에서 나는 망설이며 서 있다가 뒤를 돌아다 보았다.

태양은 이 푸르고 쾌적한 세계 속에서 빛나고 있었다. 초원에는 바람에 흔들리면서 갈색의 들꽃이 반짝였다. 그곳은 좋은 곳, 따뜻함과 기분 좋은 유쾌함이 있는 곳이었다. 그 곳에서라면 솜털이 보송보송한 땅벌처럼 한껏 만족스런 영혼이 짙은 향기와 빛 속에서 콧노래를 부를 수 있었다. 이 모든 것을 버리고 산에 오르려 한 나는 아마도 바보임에 틀림없다.

안내인이 부드럽게 내 팔을 건드렸다. 나는 미지근한 목욕물에서 힘차게 벗어나듯 그 사랑스러운 풍경으로부터 시선을 돌렸다. 이제 나는 햇빛 하나 없는 어둠의 협곡을 바라보았다. 갈라진 틈에서 작고 검푸른 시냇물 한 줄기가 흘러나오고, 물가의 작은 관목 숲속에는 파리한 풀들이 자라고 있었다. 그 시내 바닥에는 물살에 반질거리는 갖가지 돌멩이들이 한때는 살아 있던 생물의 뼈처럼 죽은 듯 창백하게 놓여 있었다.

"좀 쉬어 갑시다."
나는 안내인에게 말했다.
그는 참을성 있게 미소 지었고 우리는 주저앉았다. 날은 서늘하였다. 바위 문으로부터 어둡고 차가운 공기가 조용한 강물처럼 흘러 나왔다.

이 길을 가다니, 정말 내키지 않는 일이다! 이 불쾌한 바위 문 때문에 고통스러워 하는 것도, 이 차가운 시내를 건너는 것도, 어둠 속에서 이 좁고 가파른 협곡을 기어오르는 것도 다 싫다!

(중략)

"나는 당신을 알고 있습니다. 당신이 느끼는 두려움도 알고, 어제와 그제 당신이 했던 호언장담도 잊지 않고 있어요. 지금 당신 마음속에 불쑥 나타난 비겁함 때문에 누구나 절망하기 마련이지요. 저 편 사랑스런 햇빛이 던지는 추파는 당신보다 내가 잘 알고 있는 친밀한 것입니다."

그런 미소를 지으며 안내인은 나를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어두운 바위 골짜기로 첫 걸음을 먼저 내디뎠다. 나는 유죄 판결을 받은 자가 목 위의 도끼를 증오하기도 하고 사랑하기도 하는 것처럼 그를 증오하면서도 사랑하였다. 무엇보다도 그의 지혜와 지도력과 냉정함, 인간다운 연약함의 결여를 증오하고 경멸하였다. 그리고 내 마음속의 모든 것, 그러니까 그에게 권리를 주고, 동의하고, 그와 비슷해지고, 그를 따르고 싶어했던 그 모든 것을 증오했다.

그는 벌써 검은 시냇물 위에 놓인 돌멩이들을 성큼 성큼 뛰어넘더니, 첫번째 바위 모퉁이 부근에서 내 시야로부터 막 사라지려고 하고 있었다.

"멈춰요!"

나는 겁이 더럭 나서 소리쳤다.

"난 할 수 없어요. 아직 준비가 안됐어요."

이것이 꿈이라면, 지금 이 순간 나의 두려움이 조각나 버리고 깨어날 수 있다면.

(중략)

안내인은 손을 뻗어 뒤쪽 골짜기를 가리켰고, 나는 다시 한번 그 정겨운 지역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리고 내게 일어날 수 있는 가장 고통스러운 풍경을 보았다.

핏기없는 하얀 태양 아래 그 다정한 골짜기와 평야가 창백하고 활력없이 누워있었다. 모든 색채는 뒤섞여 날카로운 불협화음을 울리고 있었으며, 그림자들은 그저 그을린 검은 색일뿐 마음을 끄는 데라곤 하나도 없었다.

모든 것의 심장이 도려진 듯 했고, 매력이나 향기도 없어져버렸다ㅡ모든 것에서 사람들이 싫증을 낼 정도로 오랫동안 포식한 것들의 냄새와 맛이 났다.

오, 다정하고 기분 좋은 것을 무가치하게 만들고, 기력과 정신을 달아나게 하며, 향기를 변하게 하고 색깔에 조용히 독을 넣은 이 안내인의 끔찍한 짓을 알았을 때 내가 얼마나 두려워하고 증오하였는지! 아, 어제까지 포도주였던 것이 오늘은 식초가 되어버렸다는 것을 이제 알았다. 그리고 식초는 결코 다시는 포도주가 되지 않을 것이다.
결코 다시는.

(중략)

이제 오르는 것이 좀 나아졌다. 억지가 아니라 자의에 따르고 있었으며, 노래하는 게 힘들어서 아무것도 느낄 수 없었다.
그러자 내 마음도 밝아졌다. 마음이 밝아짐에 따라 미끄러운 바위도 없어졌다. 바위는 점차 건조해지고 더 호의적이 되어 때때로 미끄러지는 발을 받쳐주기도 했다. 우리 머리 위로는 더 밝은 쪽빛 하늘이 나타나 돌사이의 시냇물이 되더니, 곧 작고 푸른 호수가 되어서는 점점 커지고 넓어졌다.

나는 더 강해지고 진지해지려고 애썼다. 하늘 호수는 계속 넓어졌고 길은 걸을 만 했다. 나는 종종 안내인 곁에서 긴 구간을 고통 없이 쉽게 뛰어가기도 했다. 그러자 우리의 머리 위로 불타는 태양 속에서 번쩍이는 가파른 봉우리가 홀연히 나타났다.

정상 바로 아래에서 우리는 좁은 틈을 기어서 빠져나왔다. 눈부신 햇살이 눈속으로 밀려 들어왔다. 다시 눈을 떴을 때에는, 가슴을 압박하는 불안 때문에 무릎이 떨렸다. 내 힘으로 붙잡을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가파른 산등성이에 서 있기 때문이었다.
주위에는 끝없는 하늘, 그 푸르고 불안한 심연이 있었다. 날렵한 산봉우리가 가느다란 사다리처럼 우리 앞에 솟아 있었다.

그러나 다시 하늘과 태양이 있었다. 우리는 숨막히는 마지막 경사를 입을 꼭 다물고 이마에 주름을 잡으며 한 발짝 한 발짝 올라갔다.

그리고 정상, 빨갛게 타오른 돌을 딛고 그 엄격하고 조소하는 듯 희박한 공기 속에 섰다.

그건 정말 이상한 산, 이상한 봉우리였다! 우리가 허우적 허우적 벌거벗은 돌벽 위로 기어 올라온 이 봉우리, 그 위에는 나무 한 그루가 돌 틈에서 자라고 있었다. 짧고 튼튼한 가지가 몇개 달린, 자그마하면서도 꽤 폭이 넓은 나무였다. 형언할 수 없이 고독하고 기묘하게, 바위틈에서 견고하고 완고하게, 가지 사이에 서늘한 하늘의 푸르름을 머금고 나무는 거기 서 있었다.

나무의 맨 꼭대기에는 검은 새 한 마리가 앉아 시끄러운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세상 높은 곳에서의 짧은 휴식에 대한 고요한 꿈. 태양은 활활 타오르고, 바위는 이글거렸다. 공간을 냉엄하게 응시하며 새는 거칠게 노래했다.

"영원이여, 영원이여!"

검은 새는 노래 했다. 번쩍이는 새의 단단한 눈이 우리를 마치 검은 수정처럼 쏘아보았다. 그 시선은 견디기 힘들었고, 노래도 견디기 힘들었다.
무엇보다도 이 장소의 고독함과 공허함, 황량한 하늘의 현기증 나는 광활함이 두려웠다.

차라리 죽음이 상상할 수 없는 희열이었다. 여기 머무르는 것은 형용키 어려운 고통이었다. 무슨 일이건 일어나야 했다.
지금 당장, 순간적으로.

그렇지 않으면 우리와 세계는 두려운 나머지 돌이 되어버릴 것이다. 그것이 마치 뇌우 전의 돌풍처럼 작렬하듯 밀쳐대면서 숨을 내쉬는 것이 느껴졌다. 그것은 마치 타오르는 열기처럼 내 육체와 영혼 위로 펄럭였다. 그것은 위협적이었다. 그것은 다가왔다. 그것은 여기 있었다.

새가 갑작스레 가지에서 날아올라 추락하듯 세상 속으로 몸을 던졌다.

안내인이 훌쩍 뛰어올라 푸르름 속으로 추락하였다. 경련하는 듯한 하늘 속으로 빠져들더니, 그곳으로부터 날아가 버렸다.

이제 운명의 파도는 절정에 이르렀다. 이제 그것은 내 가슴을 잡아뜯어 소리없이 산산조각 내고 있었다.

나는 추락했다가 튀어 올라 이제 날고 있는 것을 느꼈다. 차가운 공기의 소용돌이 속으로 환희에 넘쳐, 너무 기쁜 나머지 고통에 떨며 무한을 지나 오래쪽으로, 어머니의 가슴을 향해 화살처럼 쏟아져 내려갔다.

 


환상 동화집 '험한 길'中 (19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