뛰다(2011.02.05.)
ㅡ 사실, 심장은 여러분이 생각하는 것처럼 정확히 왼쪽 흉부에 존재하는 것은 아닙니다.
P교수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강의실은 찬물을 끼얹듯 조용해졌다. 진실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사실이 거부되는 순간, 학생들은 자신들의 귀를 의심했다. 이론이며 지식이란 그런 것이다. 유령과도 같이 존재하는 그네들은, 실존하고 있는 감각과 경험을 뛰어넘는 불가사의한 힘을 지녔다.
ㅡ 그렇다면, 교수님, 심장이 오른쪽에라도 있단 말씀이십니까?
누군가, 침묵을 비집고 큰소리로 물었다. 그 질문과 함께, 강의실은 소란스러워졌다.
ㅡ 물론,
P교수는 헛기침을 하며 미소지었다.
ㅡ 드물게 오른 흉부에 심장을 지닌 사람도 있지요. 제가 말씀드리고자 했던 바는, 심장은 흉부 중심에서 살짝, 아주 살짝 왼쪽으로 치우쳤을 뿐, 정확히 왼쪽에 존재하지는 않는다는 말이었습니다.
내가 이 이야기를 진에게 들려주었을 때, 진은 슬몃 웃음지었다. 뭔가 말하려다가 멈추고는 씨익 웃으며 검지 손가락을 들어 까닥였다. 그건 진의 버릇이었다. 자신과 관련해 뭔가 하고픈 말이 생기면 늘상 검지 손가락을 들이밀며 뜸을 들이곤 했다.
키가 크지도 작지도, 그리고 마르지도 통통하지도 않았던 진은 늘 주목받고 싶어했다. 평범한 삶ㅡ 그건 진이 가장 바라지 않는 삶의 양식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나를 택했다고 말했다. 그것은,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다. 늘상 비범하고 싶던 아이가 단짝 친구로 나를 선택하다니. 나같은 범인을.
나는 그야말로 평범한 아이였다. 혼자인게 좋아 듣고픈 강의를 혼자 찾아다니고, 학교 뒤 감자밭 산책을 홀로 하곤 했다. (감자밭은 열심히 걷는다면 한시간 반이면 완주할 수 있는, 공강시간의 최선책이었다.) 음악과 책이 없이는 살 수 없어 서고가 주된 생활 공간이었고, 늘 헤드폰을 끼고 따스한 햇살을 쬐며 학교 산책을 했다. 벚꽃이 피면 지고야 말 붉은 꽃잎에 눈물 어리고, 낙엽이 질 무렵이면 그 아름다움에 매혹되어 두 시간씩 넋을 놓고 앉아있었다. 가끔 그림을 그리고, 가끔 글을 썼다. 나는 이 나라 어디서나 쉽게 볼 수 있는 인간 군상이었다.
ㅡ 나는 말야,
진은 비밀이라는 듯, 주변을 살피며 운을 뗐다. 그녀는 손을 펴서 오른 가슴 위에 얹었다.
ㅡ 나는, 오른 쪽에 심장이 있어! 드문 케이스지. 그 교수님 말씀처럼 말이야.
그녀의 음성은 고조되어 있었고, 볼 또한 발갛게 상기되어 있었다. 고양되어 있는 그녀의 자부심에 나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했다.
ㅡ 그렇군.
ㅡ 응, 정말 대단하지 않아?
눈을 반짝이며 그녀가 내 손을 잡았다. 움찔, 따뜻한 그녀의 손에 놀라 나는 그만 경기를 일으키고 말았다. 내 손은 사시사철 얼음장같아 누군가에게 쉽사리 내주고 싶지 않았다. 그런 나를 아는지 모르는지, 그녀는 내 손을 잡아끌어 그녀의 오른 가슴 위에 올려놓았다. 아니, 정확하게는 흉부의 정중앙에서 슬쩍 오른쪽으로 빗겨간 부위에. 그녀의 봉긋한 가슴이 바로 그 즈음에서 시작되고 있었고, 나는 나도 모르게 얼굴이 붉어졌다.
쿵, 쿵, 쿵, 쿵.
울림이 손을 통해 전해졌다. 그녀의 심장이 뛰고 있었다. 쿵, 쿵, 쿵. 규칙적이고도, 매우 따스하게. 이 심장의 울림을 따라 피가 두 심방과 두 심실을 지나쳐 온 몸을 돌고, 그 힘이 지금 내 눈앞의 이 사람을 살게 하는구나. 나는 왠지 모를 감격에 겨워 그녀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ㅡ 놀랍지?
그녀는 자랑스레 말하며 한껏 미소를 머금었다. 그녀의 말과는 살짝 다른 의미긴 했지만, 어쨌든 나는 놀랐기 때문에 긍정의 표시로 그녀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그 순간, 그녀는 마치 생명의 여신같았다. 아니, 생명 그 자체였다. 이렇게 생을 마주치다니, 나는 감격스러워 터져나올 것만 같은 환호성을 억누르려 하늘을 바라보았다.
ㅡ 너는,
진이 바람에 날리는 스커트 자락을 누르며 말을 이었다.
ㅡ 너는 왼쪽 심장이겠지?
내가 어떤 행동을 미처 취하기도 전에 진은 그 자그마하고 따스한 손을 내 가슴 위에 올려놓았다. 순간, 나는 진과는 달리 갈비뼈밖에 만져지지 않을 내 빈약한 가슴이 부끄러워졌지만, 이미 고등학교때부터 포기하고 있었던 부분이라 그냥 그녀를 내버려두었다.
그때, 진이 고개를 들었다. 그녀는 믿을 수 없다는 당혹스런 표정으로 황급히 손을 떼고 반대쪽 가슴에 손을 올려놓았다.
ㅡ 아, 저기, 내가, 좀, 비..빈약하지?
당황한 나는 그녀가 놀랐을 부분에 대해 변명을 하려했다. 하지만, 내가 내뱉는 말들에는 전혀 신경쓰지 않은 채, 그녀는 다시 손을 왼쪽 가슴에 댔다. 10초의 정적, 나는 돌아버릴 것만 같았다. 마침 수업이 끝난 시각이라, 그녀와 내가 앉아있던 벤치 옆 건물에서는 학생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수치심이 극한에 다다랐다.
ㅡ 저기, 진아, 지금 좀.
순간, 그녀는 그녀의 머리를 아예 내 가슴 위에 올려놓았다. 아, 이게 대체. 나는 맥이 탁 풀려서 입을 다물었다. 제기랄, 될대로 되라지. 삼삼오오 무리지어 다음 강의로 이동하는 학생들의 시선이 나와 진에게로 쏠리기 시작했다. 여기저기서 피식대는 소리, 수근대는 소리가 귓가에 꽂혔다. 진은 그것에 개의치 않는 건지, 아니면 정말 모르는 건지, 내 가슴에 머리를 얹고는 뭔가에 골몰해있었다. 이건 신종 주목받는 스킬인가, 대체 나는 무슨 죄인고, 하며 나는 멍하니 하늘만 바라보고 있었다. 하늘이 참, 맑다.
그 때였다.
진이 두 손으로 내 어깨를 붙잡고는 재빠르게 그녀의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그녀의 눈은 핏발이 서 있었고, 동공은 벌어져 기괴해보였다.
ㅡ 너, 너!
그녀는 벤치에서 벌떡 일어섰다. 일순간 그녀는 본 나이보다도 십년은 더 산 것처럼 보였다. 백지장처럼 창백하게 질린 그녀는 두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쥐어 뜯듯이 감싸 안았다.
ㅡ 심장이!
문득 시간이 늘어지기 시작했다.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긴 머리카락이 햇살을 갈랐다. 그녀가 즐겨쓰던 샴푸의 향을 가득 담은 바람이 불어와 내 볼을 스쳐 지나갔다. 천천히 달려나가는 그녀의 모습이 건물 모퉁이를 돌아서 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찬찬히 오른 손을 들어 왼 가슴 위에 올려보았다. 예상대로 살갖 바로 아래로 툭 튀어나온 갈비뼈가 느껴졌다. 그리고,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차가운 손은 뛰지 않는 가슴 위에 고이 올려져 있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