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우다 (2010.10.06)
- ..대체 왜 그런 거야.
참다 참다 나도 모르게 튀어나온 말이었다. 사람의 감정을 읽는 게 힘들다고, 난 이야기해주지 않으면 모른다고, 여러번 말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아이는 말가니 날 쳐다볼 뿐, 그 알 수 없는 속마음을 말해주지 않았다. 그러면 할 수 없다. 정공법으로 찌르는 수 밖에. 내 질문이라기보다는 힐책에 가까운 말에 한 걸음 앞서 걷던 그 아이는 흠칫 몸을 멈추는가 싶더니, 천천히 고개를 이쪽으로 돌렸다.
-......
무엇을 담고 있는 지, 깊이를 알 수 없는 아이의 눈동자가 흔들림없이 날 바라보고 있었다. 바람이 불었다. 아이의 긴 머리카락이 바람이 쓸고 가는 모양 그대로 공중에 걸렸다.
-.. 바람이,
바람에 가리워 목소리가 제대로 들리지는 않았지만, 아이의 입모양이 보였다.
-바람이 부네요.
질문과는 전혀 상관없는 단어의 나열. 나는 그만 힘이 쭉 빠졌다.
-저기,
아이는 찬찬히 손을 들어 정자를 가리켰다. 하얀 손가락이 참 길다.
-저기 갈래요? 가서 좀 앉아요.
차근 차근 내뱉는 음가의 조합, 아이의 감정이 실리지 않은 청량한 목소리에는 결코 거역할 수 없는 무언가가 존재한다. 목까지 치밀어오르는 수많은 단어가 처절하게 뜯기고 갈려, 나는 아무말도 못한 채 아이를 따라 길을 걷는다.
-나는 이런 하늘이 참 좋아요. 코발트 블루. 너무 예뻐.
하늘을 바라보며 걷는데도 전혀 휘청거리지 않는다. 늘상 하늘을 보며 걷는 사람인 양. 복잡스러워 발 밑에 치이는 모든 것에 늘 신경쓰지않으면 안되는 이 도시에서, 이 아이는 어떻게 살아온 것일까. 위화감이 들어 그저 아이를 바라본다.
-.. 그리고 바람도.
손을 내민다. 긴 손가락으로 지나가는 바람을 훑는다.
-욕심이에요.
정자에 앉아 아무말 없이 흔들리는 나뭇가지를 바라보던 아이가 문득 입을 열었다. 이건 또 뭔소린가 싶어 아이를 힐끗 바라본다. 아이의 시선이 나뭇가지에서 부유하는 공기를 따라 하늘 저 끝을 향한다. 처연스런 표정이 공기의 장벽을 만들어냈다.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건, 필연적으로 그 사람을 소유하고 싶은 욕구를 불러일으키는 거에요. 인간은 선천적으로 악한 존재니까, 자신이 좋아하는 걸 타인과 공유하고 싶어하지 않는 이기주의자들이죠. 나도 어쩔 수 없어요. 좋아지면, 좋아지면, 나도 그들과 똑같아지죠.
아이는 노래하듯 고즈넉하게, 하지만 리듬과 적절한 높낮이를 따라 말한다.
-나는, 그게 힘들어요.
문득 쳐지는 듯한 아이의 눈꼬리.
-누군가를 욕망하고 내 시선 안에 가두려는 것ㅡ 그것 자체를 견딜 수가 없어요. 내게 무엇인가 특별해지면, 그걸 보는 순간 순간, 생각하고 느끼는 순간 순간, 견딜 수가 없어요. 그래서 무욕해지는 거에요. 그러면, 그러면 괜찮거든요. 모든 게 욕망의 대상에 벗어나, 그저 있는 그대로 존재하게 되죠.
산 너머 구름 저 편 어딘가를 응시하던 아이가 처음으로 내 쪽을 돌아보며 웃었다.
-비우는 거에요, 내 마음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