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시마 다케오 <어떤 여자>
‘토하면 괜찮아질 거야.’
이렇게 생각하며 난간 밖으로 몸을 내미는 순간, 온몸의 힘이 배에서 가슴으로 몰렸고, 등은 저절로 격렬하게 물결쳤다. 그후로는 이미 꿈결과도 같았다.
잠시 후 요코는 힘이 쭉 빠져서 손수건으로 입가를 닦으며 맥없이 주위를 둘러봤다. 갑판 위에도 파도 위처럼 황량할 정도로 인적이 없었다. 환한 불빛이 새어나오던 채광창도 하나도 빠짐없이 커튼으로 가려져 어두워져 있었다. 오른쪽에도 왼쪽에도 사람이라곤 없었다. 이런 생각을 하느라 느슨해진 마음의 틈새를 파고들었는지, 가슴의 고통이 느닷없이 또 밀려왔다. 요코는 또다시 난간 밖으로 몸을 내밀고 뜨거운 눈물을 뚝뚝 흘렸다. 마치 높이 매달려 있던 커다란 돌이 뚝 떨어진 것처럼, 과거라는 것이 커다란 하나의 어두운 슬픔이 되어 가슴을 쳤다. 철이 든 이후부터 스물다섯이 된 오늘까지 팽팽하던 마음의 줄이 이제야 한껏 느슨해진 것만 같은 그 슬픈 쾌감
.
요코는 이런 덧없는 슬픔에 잠기면서 깍지 낀 두 손 위에 이마를 얹고는 난간에 기댄 채 무거운 호흡을 하면서 하염없이 울고 있었다. 일시적인 빈혈을 일으킨 이마는 시체처럼 싸늘해져, 요코는 울면서도 어느새 끌려들어가듯이 옅은 잠에 빠져들려고 했다. 그러다가는 뭔가에 놀란 듯이 눈을 번쩍 뜨면, 또다시 끝을 알 수 없는 슬픔이 어디선가 밀려왔다. 슬픈 쾌감. 요코는 초등학교에 다니던 시절에도 울고 싶을 때는 남 앞에서는 이를 악물고 있다가 아무도 없는 데로 가서 숨어서 울었다. 눈물은 남에게 보인다는 것은 구차한 일로만 여겨졌다. 거지가 동정을 구한다든지 노인이 푸념을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요코에게는 추접스럽게 여겨졌던 것이다. 그러나 이날 밤만은 누구 앞에서든 순수한 마음으로 울 수 있을 것 같았다. 누군가가 보는 앞에서 엉엉 울어보고 싶은 마음마저 들었다. 진정으로 동정해줄 사람도 있을 것만 같았다
.
이런 심정으로 요코는 소녀처럼 하염없이 울고 있었다.
(중략)
그러나 청년을 동정함과 동시에 요코의 눈은 번개처럼 사무장의 뒷모습을 비스듬히 훔쳐봤다. 청년을 동정하는 자신은 사무장의 동정을 받고 있는 건 아닐까? 내내 한 발짝씩 앞서가는 사무장을 일종의 증오심을 품고 쳐다봤다. 일찍이 느껴본 적이 없는 이 증오심을 요코는 어떻게 주체할 수가 없었다.
두 사람과 헤어져 선실로 돌아온 요코는 거의 delirium 상태에 있었다. 눈을 크게 뜨고 있으면서도 장님처럼 방 안의 물건들을 보려고 하지 않았다. 싸늘해진 손끝은 덜덜 떨며 양쪽 소매를 쥐었다 폈다 하고 있었다. 요코는 정신없이 숄과 목도리를 벗어던지고 허둥대며 오비만을 풀고는 머리도 풀지 않고 침대 위에 쓰러져, 누운 채고 깃털베개를 두 손으로 꽉 쥐고 얼굴을 파묻었다. 영문을 알 수 없는 눈물이 봇물 터진 것처럼 쏟아졌다. 그러더니 눈물은 계속해서 흘러넘쳐 시트를 적셨고, 충혈된 입술은 무서운 미소를 띤 채 와들와들 떨고 있었다.
(중략)
구라치에게서 벗어난 요코는 마치 어미 품을 떠난 아기처럼 갑자기 온몸의 힘이 쫙 빠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 뒤에 남은 것이라곤 감당할 수 없는 끝없는 비애뿐이었다. 이제까지 경험한 그 어떤 비애보다도 더욱 잔혹한 비애가 요코의 가슴을 쥐어뜯으며 엄습해왔다. 그것은 구라치가 그 자리에 있다는 사실조차 잊게 할 정도였다. 요코는 느닷없이 이불 위에 몸을 웅크리며 쓰러졌다. 그리고 엎드린 채 발작적으로 격렬하게 울기 시작했다. 구라치가 그 울음소리에 잠시 어리둥절해서 선 채로 바라보는 동안, 요코는 마음속으로 외치고 또 외쳤다.
‘죽이려면 죽여. 죽어도 좋아. 죽어도 언제까지고 증오해줄 테니까 괜찮아. 난 이겼어. 여하튼 이겼어. 이토록 슬픈데 왜 빨리 안 죽이는 거지? 이 슬픔에 언제까지고 잠겨 있고 싶다. 아, 빨리 죽어버리고 싶다……’
(중략)
문밖에서는 주먹으로 계속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요코는 안절부절 못하며 기모노 앞자락을 여민 다음 어깨 너머로 거울을 쳐다보며 눈물을 닦고 눈썹을 매만졌다.
“사쓰키 씨!!”
요코는 잠시 어떻게 할지 망설이다가 이윽고 결심을 하고 허둥지둥 열쇠를 찰칵거리며 문을 열었다.
사무장은 곤드레만드레가 되어 들어왔다. 아무리 마셔도 안색도 변하지 않을 정도로 술이 센 구라치가 그 정도로 취하는 건 드문 일이었다. 닫힌 문에 장승처럼 기대고 서서, 냉담한 태도로 거리를 두고 서 있는 요코를 뚫어질 듯이 쳐다보면서 말했다.
“요코 씨, 요코 씨라고 부르는 게 싫으면 사쓰키 씨라고 부르지. 사쓰키 씨…… 내가 하는 행동은 그만한 각오가 있어서 하는 거요. 난 말이오. 요코하마에서부터 이미 사쓰키 씨한테 반했었소. 그걸 모를 사람이 아니잖소? 폭력이라고 했소? 폭력이 뭐라고 생각하오? 폭력은 어리석은 거요. 죽이고 싶어지면 얼마든지 죽여주지.”
요코는 이 마지막 말을 듣자 현기증이 날 정도로 기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