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치노세와의 대화 (2010.11.10)
-곤란해,
잔뜩 찡그린 얼굴의 이치노세가 고개를 갸웃 내밀고 나를 올려다본다. 두 손에 들린 아이스티 속 얼음이 짤랑, 하고 소리를 냈다.
-뭐가 곤란하다는 거야.
이치노세가 고개를 내민 만큼 2인치만큼 가까워진 거리가 부담스러워 나는 마시고 있던 아메리카노를 내려놓고 소파에 몸을 묻었다. 또 다시 멀어진 2인치가, 아니, 어쩌면 3인치는 더 될 거리가, 그리고 부드러운 소파가 잔뜩 긴장한 등을 감싸주었다. 편안해지는 이 기분, 나는 안도의 한숨을 쉬며 이치노세를 바라보았다.
-당연히 곤란하지.
이치노세는 아이스티에 꽂힌 빨대로 갈색 투명한 액체를 쪼옥 소리나게 빨아들인다. 곤란하다는 말과는 어울리지도 않게 행복한 표정이다. 행복한 표정이라니, 도대체가 이치노세랑은 어울리지 않는다. 문득 잠잠히 가라앉아 있던 감정이 부글거리는 것 같아 흠칫했다. 자아, 미영, 릴렉스. 너무 발끈하지는 말자.
-그러니까, 미영, 너의 그 친절하고도 착한 성격은 가식이라는 거야.
가식? 자제하려고 해봤지만 내 의지와는 반대로 이미 오른 입꼬리는 귀 쪽으로 향해 쫑긋 올라가고야 말았다.
-그렇게 인간들에게 친절하고 유난히도 잘하려는 건, 결국 네가 그 자리를 비웠을 때, 타인들로 하여금 너를 기억하게끔 하는 거잖아?
그렇게 말한 적은 없는데, 그렇게 생각한 적도 없고.
-네가 그렇게 잘하면 잘할수록 네 자리는 커져만 가지. 하지만 너란 아이는 특질상 오래 머물지 못해. 넌 보헤미안이니까. 늘 그렇듯 훌쩍, 네 자리를 비우겠지. 그러면 주위 사람들은 평소엔 못 느끼던 공허함을 느낄 거야. 넌 그 공허함과 우왕좌왕하는 사람들을 지켜보는 게 좋은 거야, 아니, 굳이 지켜보지 않더라도 그걸 느끼고 상상하는 게 좋은 거지. 혼돈의 에너지, 그게 좋은 거 아니야? 그걸 극대화하기 위해 넌 ‘곁에 있을 때 잘한다’는 쓸데없는 모토를 지키고 있는 거야.
말을 잠시 멈춘 이치노세는 빨대로 아이스티를 한 번 휘저었다. 찰랑, 하고 햇빛에 흩어지는 아이스티의 방울이 컵을 넘어 탁자에 떨어졌다. 전체에서 분리된 아이스티 방울이 사랑스러워 지켜본다. 닦아내지 않고 내버려두면 탁자 유리에 그대로 말라붙겠지. 그렇게 자기 자신이 세상에 존재했음을 알릴 거다. 그렇게 알리는 것이다.
-..미영, 너는 감정적인 사디스트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