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ice in Wonderland

<노르웨이의 숲> by 무라카미 하루키 본문

Bookworm

<노르웨이의 숲> by 무라카미 하루키

Liddell 2010. 11. 24. 11:45


그녀는 그때 무슨 이야길 하고 있었던가?

그렇다. 그녀는 내게 들판의 우물 이야길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우물이 정말 있었는지는 나는 모른다. 어쩌면 그것은 그녀의 안에밖엔 존재하지 않는 이미지이거나 기호였는지도 모른다ㅡ그 어두운 나날엔 그녀가 그 머리 속에서 실을 뽑듯 자아낸 다른 수많은 사물들과 마찬가지로.

하지만 그녀가 그 우물 이야기를 해준 다음부터는 나는 그 우물의 모습이 없이는 초원의 풍경을 떠올릴 수가 없게 돼 버렸다. 실지로 내 눈으로 본 것도 아닌 우물의 모습이 내 머리 속에선 분리 할 수 없는 일부로 그 풍경 속에 뚜렷하게 붙박혀 있는 것이다.

(중략)

"그건 정말ㅡ정말 깊단 말이에요."
하고 그녀는 신중하게 어휘를 골라가면서 말했다.

그녀는 가끔 그런 식으로 이야기 했다. 정확한 어휘를 골라 찾으면서 아주 천천히 이야기하는 것이다.

"정말 깊단 말이에요. 하지만 그것이 어디에 있는진 아무도 알지 못해요. 이 언저리 어딘가에 있다는 건 확실하지만."
그녀는 그렇게 말하곤 윗옷의 포켓에 두 손을 찔러 넣은 채, 내 얼굴을 보면서 정말이에요, 하듯 생긋 미소를 지었다.

"그렇다면 위험하기 짝이 없잖아."
하고 나는 말했다.
"어딘가에 깊은 우물이 있다, 그런데 그게 어디에 있는진 아무도 모른다... 그럼 거기에 빠지기라도 하면 어쩔 수도 없잖아?"
"어쩔 수도 없겠죠. 쉬익ㅡ풍덩. 그걸로 끝장이죠, 뭐."
"그런 일이 실제로 일어날까?"
"가끔 일어나요. 2년 또는 3년에 한 번쯤... 어떤 사람이 갑자기 없어져서 아무리 찾아도 찾아지지 않는 거에요. 그렇게 되면 이 근처 사람들은 말하죠. 들판의 우물에 빠진 거라고요."

(중략)

그녀는 포켓에서 왼손을 꺼내어 내 손을 쥐었다.

"하지만 걱정 없어요, 당신은 아무 염려 말아요. 당신은 어두운 밤에 이 근처를 무작정 걸어다닌다 해도 절대로 그 우물에 빠지진 않을테니까요. 그리고 당신과 이렇게 꼭 붙어 있는 한 나도 절대로 빠지지 않을 거에요."
하고 그녀는 말했다.

"절대로?"
"절대로."

"어떻게 그걸 알 수 있지?"
"난 알 수 없어요. 그냥 알아요."
그녀는 내 손을 꼭 쥔 채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잠시동안 말없이 걷기만 했다.

"난 잘 알아요. 이유라든가 그런 것이 아니라 그냥 느끼는 거에요. 말하자면 지금 이렇게 당신과 꼭 붙어 있으면 말이에요. 난 전혀 무섭지 않아요. 어떤 나쁜 일이든 어두운 일이든. 나를 유혹하려 하지 않는 거에요."

"그럼 문제는 간단하군. 줄곧 이렇게 하고만 있으면 그만일테니까."
하고 내가 말했다.

"그거ㅡ진정이에요?"
"물론 진정이지."

그녀는 걸음을 멈추었다. 나도 걸음을 멈추었다. 그녀는 두 손을 내 어깨 위에 얹은 채, 정면으로 내 눈을 물끄러미 들여다 보았다. 그녀의 깊은 눈동자 속에서는 검고 묵직한 액체가 기묘한 도형의 소용돌이를 그려내고 있었다. 그 아름다운 두 눈동자가 한참동안 나의 내면을 들여다 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발돋움을 하더니 내 볼에다 살며시 그녀의 볼을 대었다. 그것은 한 순간 가슴이 막혀버릴 만큼 뜨겁고 멋진 동작이었다.
"고마워요."
그녀가 말했다.
"천만에."
"그렇게 말해줘서 정말 기쁘지 뭐에요, 정말."
하고 그녀는 서글픈 듯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하지만 그럴 수가 없어요."
"어째서?"
"그건 안될 일이니까요. 잔혹한 일이니까요. 그리고 그건ㅡ"

말을 하다가 그녀는 잠시 입을 다물고 그대로 걷기만 했다. 갖가지 상념들이 그녀의 머리 속에서 빙글 빙글 돌고 있다는 것을 알았기에, 나 역시 말없이 그녀의 곁에서 묵묵히 걷기만 했다.

한참 뒤에야 그녀는 이렇게 말을 이었다.

"그건ㅡ올바른 일이 아니기 때문이에요. 당신에게도 내게도."

"어떻게 올바르지 못한 일이지?"
하고 나는 조용히 물었다.

"글쎄요, 누가 누군가를 영원히 지킨다는 그런 일은 불가능하기 때문이에요. 안 그래요? 가령 내가 당신과 결혼을 했다고 해요. 그럼 당신은 회사에 다니겠지요. 그럼 당신이 회사에 있는 동안 도대체 누가 나를 보호하고 지켜줄까요? 당신이 출장을 가 있는 동안에도 역시 누가 나를 지켜주지요? 그러니 나는 죽을 때까지 당신과 붙어 다녀야 하잖아요, 안 그래요? 그런게 대등은 아니잖아요. 이런 것은 인간관계라고 할 수도 없겠지요? 그리고 언젠가 당신은 내게 싫증을 느끼는 거에요. 내 인생이란 게 도대체 무엇이렀단 말인가? 이 여자아이를 돌보는 일뿐이란 말인가, 하고. 난 그런 거 싫어요. 그래서는 내가 안고 있는 문제가 해결되는 게 아니니까."

"이런 일이 일생동안 계속되는 건 아냐. 언젠가는 끝나. 끝나는 곳에서 우리는 다시 한번 생각하면 좋은 거야. 이제부터 어떻게 될 것인가 하고. 그때는 어쩌면 나오코가 나를 도와주게 될지도 모르지. 우리는 수지결산표에 맞추어 살고 있는 건 아냐. 만약 나오코가 지금 당장 내가 필요하면 나를 쓰면 되는 거야. 안 그래? 어째서 그런 식으로 만사를 고리타분하게만 생각하지? 어깨의 힘을 좀 빼라구. 어깨에 힘이 들어가 있으니까 그런 식의 생각으로 사물을 보게 되는 거야. 어깨 힘을 빼면 훨씬 몸이 가볍게 돼."

"어째서 그런 식으로 말을 하죠?"
하고 그녀는 몹시 메마른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의 목소리를 듣자 나는 내가 뭔가 아주 잘못된 말을 한 것 같다고 생각했다.

"어째서요?"
하고 그녀는 꼼짝을 않고 발밑의 지면을 응시하면서 말했다.
"어깨 힘을 빼면 몸이 가벼워진다는 것쯤은 나도 알고 있어요. 그런 말을 해보았자 아무 소용이 없어요. 알겠어요? 내가 지금 어깨 힘을 빼면 나는 산산조각이 난단 말이에요. 나는 애당초부터 그렇게 살아왔고 지금도 그런 식으로밖에 살아갈 수 없는 거에요. 한번 힘을 빼면 다시는 제자리로 돌아갈 수 없는 거에요. 난 산산 조각이 나서 어딘가로 날아가 버리는 거에요. 어째서 그걸 모르는 거죠? 그걸 모르면서 어떻게 나를 돌봐준다는 말을 할 수가 있죠?"

(중략)

"미안해요."
하고 말하고 그녀는 내 팔을 살며시 잡았다. 그리고는 몇번인가 고개를 저었다.
"상처를 입힐 생각은 없었어요. 내가 한 말에 신경쓰지 말아요. 정말 미않애요. 난 다만 나 자신에게 화를 내었을 뿐이니까요."

"난 아마도 나오코에 대해 아직은 정말 이해하고 있다고는 생각지 않아."
하고 나는 말했다.
"나는 머리가 좋은 인간도 아니어서 무엇을 이해하는데 시간이 걸리지. 하지만 만일 시간만 있다면 나는 나오코를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고, 그렇게 되면 나는 이 세상의 누구보다도 나오코를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해."

우리는 거기에서 멈추어 서서 정적 속에서 귀를 기울이며, 나는 ㅜ두 끝으로 매미의 사해나 솔방울을 굴리기도 하고, 소나무 가지 사이로 보이는 하늘을 우러러 보기도 했다. 그녀는 윗옷 포켓에다 두 손을 집어 넣은 채, 무엇을 눈여겨 보는 것도 아니면서 무슨 생각엔가 골몰해 있었다.

"봐요, 와타나베. 날 좋아해?"

"물론이지."
하고 나는 대답했다.

"그럼 내 부탁을 두 가지만 들어 주겠어?"
"세가지라도 들어주지."
그녀는 웃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두 가지면 그만이에요. 두 가지면 충분해요. 하나는 당신이 이렇게 날 만나러 와준 데 대해 내가 굉장히 감사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줬으면 해요. 정말 기쁘고 정말 구제받은 것 같아요. 혹시 그렇게 보이지 않았다 해도."
"또 만나러 올거야."
하고 나는 말했다.
"또 하나는?"

"나를 꼭 기억해 주었으면 해요. 내가 존재해서 이렇게 당신 곁에 있었다는 사실을 언제까지라도 기억해 주겠어요?"


-무라카미 하루키 '노르웨이의 숲(상실의 시대)'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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