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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피노자 <신학-정치론>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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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피노자 <신학-정치론>

Liddell 2011. 4. 25. 19:05

서문

 

사람들은 절망에 빠지거나 문제에 대한 어떠한 해결책도 발견할 수 없을 때 미신에 매달리고는 한다. 이성이 아닌 욕망에서부터 비롯된 미신은 불안정의 다른 모습인데, 이러한 불안정은 종종 종교의 형태로 나타나기도 하며 군주제적 통치의 한 양식으로 악용되기도 한다. 인간은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자유를 지닌 존재이기에 종교에의 자유, 또한 지닐 수 있으며 이는 국가의 평화나 기강과는 관련이 없기에 권력에 예속되어서는 안 된다.

소위 기독교인이라고 하는 사람들, 특히 높은 지위에 앉은 이들이 실질적으로 종교 확장, 혹은 권력에 눈이 어두워 성경을 자신들의 입장에 꿰 맞추어 설파하며 신비주의를 조장했다. 이에 스피노자는 입장과 입지라는 편견을 제거한 자유로운 정신으로 성서를 시험하고 성서에서 분명히 추론되는 것들만을 진실로 인정하기로 결심했다. 여기에서 그는 자연의 빛과 예언, 초월성, 그리고 히브리 인들의 선택과 제의, 기적, 성서 해석 등의 문제를 제기하며 논문을 시작한다.

 

 

7장 성서 해석에 관해서

 

많은 사람들이 신의 말씀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 성서는, 역사를 지내오면서 파렴치한들의 잘못을 덮어주기 위한 목적으로 많은 부분에서 위조되어 왔다. 성서를 더욱 영적이고 신비스러운 것으로 만들기 위해 이성과 본성에 반대되는 방향으로 성서를 해석하고 그 밑의 숨은 비밀을 만들어내는 일이 자행되었기 때문에 종교에 있어서 미신의 색이 더 짙어졌다. 여기에 휘둘리지 않기 위해 성서의 진실된 해석 방법을 찾던 스피노자는 성서 해석 방법이 성서 그 자체에 의존한다는 점에서 자연 해석 방법과 별반 다르지 않다고 이야기한다. 성서를 기록하는데 쓰인 언어의 성질과 특성, 그리고 그 역사적 시점과 각 문서의 배경에 대한 정보가 없이는, 명료하지 않은 어떠한 가르침이라도 성서의 뜻인 양, 오인되어서는 안 된다. 성서의 해석은 유일한 믿음의 대상이자 모든 개인을 사랑하며 그들에게 그들의 이웃을 사랑하라고 명하는 하나뿐인 전능한 신이 있다는 보편적이고도 확고한 가르침으로부터 덜 일반적인 가르침으로 나아가게 되는데, 이 특별한 양상의 가르침에서는 항상 어느 상황에서 누가 이야기했는지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또한 예언자들과 역사 서술자들이 해석한 의미와 실제 진리의 내용을 혼동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그런데 이러한 성서의 해석에는 커다란 장애물이 존재한다. 이것은 더 이상 실재하지 않는 언어인 히브리어에 대한 완전한 지식을 요한다는 점과 성서의 모든 문서의 배경의 대부분을 우리가 알 수 없다는 점이다. , 성서 문서들의 원본은 존재하지 않으며 사본은 원래 씌어진 언어가 아닌 다른 언어로 이미 번안되어 있다는 점이다. 하지만 실제적으로 가장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진실한 신앙심에 대한 가르침은 매우 일반적인 말로 표현되어 있으며, 이 일반적인 표현들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지식으로도 충분히 역사적 연구 방법을 통해 해석될 수 있는 부분이다. 따라서 우리를 구원으로 인도하는 주제에 대해서는 명확히 알 수 있는 것이다. 종종 자연의 빛만으로는 소용이 없고 초자연적 계시가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으나, 그들은 단지 추측만으로 이야기 할 뿐이며, 그들의 설명을 듣자면 자신들의 주장을 폄에 있어서도 자연의 빛에 매우 의존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들은 초자연적 계시를 말하기 이전에 자연의 빛이 부족하기에 성서의 의미를 왜곡하고 있는 것이다. 마이모니데스는 사람은 오로지 이성에 의지하여 성서를 판별해야 한다고 말하는데 스피노자는 여기에 몇 가지를 들어 그의 주장을 반박한다. 첫째로 성서는 결코 자연의 빛으로 알려진 원칙과 부합되는 이야기를 하지 않기 때문에 자연의 빛에 의해서만은 결코 알 수 없다. 둘째로 구원에 관해서는 일반 사람들도 쉽게 이해할 수 있기 때문에 예언자들이 말하는 바를 알기 위해 그 근본 가르침부터 배워야 한다는 마이모니데스의 주장은 받아들일 수 없다. 셋째, 예언자들은 결코 과학적 진리에서 결론을 이끌어내지 않았으며, 넷째, 성서의 의미는 성서 자체를 통해 분명해질 수 없다는 마이모니데스의 주장에 대한 반박은 이미 언급한 바 있다. 마지막으로 그의 견해는 우리의 선입관에 따라 성서의 왜곡 가능성을 잠재하고 있다는 것이다. 인간이 성서 왜곡의 자유를 누린다면 우리는 이미 성서의 내용을 증명할 수도, 더 이상 설명할 수도 없을 것이다. 성서 해석에 대해 최고의 권위가 각 개인에게 속해 있기 때문에 누구에게나 공통적인 자연의 및 이외에 다른 어떤 규범도 성서 해석에 필요하지 않다. 이는 매우 자연적이고 일반적인 사고력을 따른 점이며 이에 대한 어려움은 인간의 부주의에서 비롯된다.

 

 

12장 거룩한 법의 진실한 기원에 관해서. 그리고 성서는 어떤 의미에서 거룩한 문서인가. 성서가 신의 말씀을 포함하고 있는 한에서, 성서는 훼손되지 않고 우리에게 전해졌다.

 

영원한 말씀과 신의 영원한 계약, 그리고 진실한 종교는 신으로부터 부여 받은 사람의 정신 안에 씌어졌으며 이것이 바로 신의 거룩한 법이다. 성서 문서의 말씀이 다른 의미를 갖게 되거나 반대되는 의미를 부여하는 언어 용법으로 해석이 되면 더 이상 성서는 거룩한 문서가 아니며 세속적이고 평범한 것이 된다. 여기에서 거룩과 세속의 경계는 마음과의 관계 속에 있음을 스피노자는 보인다. 성서의 거룩성은 사람들이 성서를 통해 신을 섬기고 예배할 때에 나타나는 것이라 주장하며 그는 성서가 철두철미하게 위조되었다거나 왜곡되어 있다고 오해할 사람들을 철저히 차단한다. 성서를 살피면 신 자신 외의 다른 것과 관련되어서는 신은 전 인류에게 공통된 보편적 종교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 진실한 종교 때문에 신은 성서의 저자이며 평범한 사람이라도 누구든지 어떠한 어려움이나 모호함 없이 신과 이웃을 사랑하라는 중요 가르침을 이해할 수 있다. 처음 의도된 몇 가지 지엽적인 말씀들은 종종 여러 요인에 의해 변할 수 있으나 근본적인 가르침은 결코 변하거나 위조될 수 없기 때문에 성서는 신의 말씀을 그대로 간직한 채 우리들에게 전해졌다고 할 수 있겠다.

 

 

17장 이성이 신학에, 신학이 이성에 종속되지 않는다. 그러면 어떤 근거에서 우리가 성서의 권위를 확신할 수 있는가

 

철학과 신학의 우위에 있어 회의론자들과 교의학자들 사이에서 수많은 논의가 있었으나, 스피노자의 입장에서는 그들의 두 입장 모두 불합리하다. 이 두 입장의 대표로 마이모니데스와 예후다 알파카가 손꼽히는데 마이모니데스의 입장에 대해서는 이미 7장에서 논의되었으므로 이성이 철저히 성서에 종속되어야 한다는 알파카의 입장만을 살핀다. 그는 성서의 교리와 아주 분명히 확증된 것 이외에 모순되는 것들은 비유로 해석 되어야 한다고 이야기하는데 이 입장은 스피노자의 입장과 같다. 하지만 알파카는 이성적인 성서 해석이 없이 맹목적인 성서 해석을 종용하며, 성서에서 드러나는 모순적 입장들에 대해 분명한 입장 밝히기를 꺼린다. 이는 그가 성서가 매우 다양한 시기에 다양한 사람들에 의해 다양한 목적으로 씌어졌다는 것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으며 그 자신의 개인적 권위로 추론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렇듯 마이모니데스나 알파카의 입장을 모두 거부하며 스피노자는 다음과 같이 신학과 이성의 관계를 정립한다. 신학은 믿음에 대한 가르침, 결국 순종으로 충분하며 이 가르침이 더 잘 이해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이성이 해나갈 몫이라는 것이다. 그의 말에 따르면 신학은 계시, 신의 말씀으로, 삶을 위한 신학의 규정과 교리는 결국 이성과 일치하기 때문에 신학은 보편 타당한 존재로 인정된다. 여기에서 이성을 통해 신학의 근간을 확인할 수 없다는 의문이 제기되는데 스피노자는 자연의 빛으로는 신학의 근본 교리를 밝힐 수 없기 때문에 계시가 존재하며, 그 계시에 대한 우리의 판단이 필요로 함을 들어 신학의 근본을 논한다. 성서의 진실한 예언자들이 가르침과 표적에 따라 거짓 예언자들과 구분됨에서 그들이 이성과 일치하지 않는 도덕을 가르친 게 아니라는 점을 기억한다면 이는 신의 말씀과 전적으로 일치하며, 따라서 우리는 이성적 판단을 통해 전체 신학과 성서의 근본을 인정할 수 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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